우리나라 사람이면서 나라를 팔은 매국노들도 있지만, 하무 연고 없는 한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가 있습니다.
1949년 주미한국대사관을 나서는 한 80대 미국인으로 기자가 노인에게 질문을 합니다.
그는 도대체 누구이기에 한국 땅에 묻히길 원한 것일까?
한국의 독립과 문명화를 위해 일생을 바친, 호머 헐버트.
1882년 조선과 미국 수교 체결을 했는데, 조미수호통상조약, 미국이 궁금했던 고종, 미국을 살펴보고 오라며 외교 사절단인 보빙사를 파견합니다. 1883년의 미국은 언빌리버블이죠.
이미 몇년 전 발명된 전구, 가로등을 보고 놀라고, 엘리베이터 보고 놀라고, 미국에서 보고 온 것을 고종에게 보고한 사절단, 그리고 가만히 듣던 고종은 미국을 배워야 해!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설립합니다. 영어로 수업을 하기 위해 미국에 연락을 합니다. 영어 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죠. 그렇게 오게 된 호머 헐버트.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교육했지만, 영어 수업의 한계를 느꼈다고 해요. 효율적인 수업을 위해서는 직접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며, 그때부터 한국어 배우기를 시작합니다. 3년 만에 한국어를 마스터합니다. 하지만 호머 헐버트는 3년 만에 한글로 교과서를 제작하고 조선인에게 세상을 알려주기 위해 세계 지리 지식과 문화를 소개하는 책 사민필지를 씁니다.
사민필지는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가 세계 각국의 산천, 풍토, 정령, 학술등을 소개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과서에요.
그의 그치지 않는 한글 사랑,
잘 활용되지 못함을 안타까워 한 호머 헐버트, 한글 활용을 위해 만든 띄어쓰기, 쉼표, 마침표를 직접 제안하고 도입했다고 해요.
노래도 서양식 악보로 기록, 조선이 일제로부터 위협받는 상황을 알게 되며 조선의 정치와 외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합니다. 대한제국 시절 명성황후 시해 사건 발생 후 고종의 경호를 자처합니다. 고종의 침전 불침번을 선 헐버트, 왜냐하면 일제가 미국인을 해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거죠. 그런 헐버트를 신뢰하게 된 고종.
을사늑약 체결을 앞두고 고종이 헐버트에게 한 부탁이 있어요. 미국 대통령에게 가서 을사늑약 체결을 막아달라고 한 것, 1882년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 그중 한 조항의 내용이에요.
미국 대통령을 찾아간 헐버트. 그런데 반전이 발생합니다. 당시 대통령이 시어도어 루스벨트인데 힐버트를 만나 주지 않습니다. 고종과 헐버트가 모르고 있던 게 있었으니, 이미 일본과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거죠.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1905년 일본과 미국이 대한제국과 필리핀에 대한 서로의 지배를 인정한 협약이에요. 필리핀은 미국이 대한제국은 일본이 자기들끼리 정해버림, 이 밀약 때문에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이죠. 이 사실을 몰랐던 고종과 헐버트.
헐버트가 동분서주하는 사이, 을사늑약이 체결됩니다.
미국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나라였다니, 다시 대한제국으로 입국합니다.
그리고 고종에게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니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라고 알려줍니다.
이준, 이상설,이위종을 헤이그로 특사 파견하고 먼저 헤이그로 떠난 헐버트는 각국 대표에게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폭로합니다.
타국의 억압과 고통을 내 일처럼 여긴 헐버트, 과연 어떤 심리일까??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으로 앞장서 도움을 준 헐버트. 그런데 일본은 헐버트의 헤이그 활동을 눈치채고 조선에서 추방합니다. 당시 상하이 한 은행에 내탕금을 예치해 둔 고종.
내탕금을 찾아 독립활동을 하도록 하는데, 막상 가보니, 돈이 없는거에요. 해방될 때까지 돈을 찾기 위해 노력한 헐버트.
1945년 조선의 해방.
1949년 8월 15일 광복절, 대통령의 초대를 받고 한국을 찾게 된 헐버트. 배를 타고 한 달만에 도착합니다.
고령과 여독으로 인해 입원을 하는데, 결국 일주일 만에 그토록 염원했던 순간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한국에서 생을 마감한 호머 헐버트.
그리고 그의 소원대로 40년 만에 찾은 한국 땅에서 영면하였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서 잠든 헐버트.
출처: 어쩌다 어른.